글 짓기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세상에는 교환 아닌 것이 별로 없으므로, 좋은 글을 얻고 싶다면 이쪽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줘야 한다는 것.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줄 수 있다. 생명은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시간이라는 형태로 분할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
사람도 그렇지만 글쓰기도 그렇다.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안 준 것이다.
출처 : p28, <책머리에 - 두번째 산문집을 엮으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이 장을 읽자마자 나는 무엇을 위해 나의 생명을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프로그래밍, 영어, 그리고 아주 가끔 읽고 싶은 책 읽기. 내가 그 전까지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이 내 생명을 줄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최근 깨닫고 있다. 그래서 이제라도 뒤늦었지만 난 이 질문을 못난 스스로를 자책하며 매일 던지고 있다. 내가 이 물음에 빠져있어서인지 어제 장애학 세미나를 같이 하는 회원분들과 오프라인으로 만나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맥주를 마셨을 때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그 질문을 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자리에 있는 회원분들부터 그들이 아는 건너건너의 사람들은 내 눈에는 민주화, 철학, 빈곤, 생태, 역사 등등 자신이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푹 빠져있는 사람들 같았다.
"저는 멘토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겠죠. 아무리 조심해도 분명히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될 거예요. 그 난관을, 여러분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돌파할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리고 훗날 회한과 함께 돌아볼 때가 올 텐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질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출처 : p176,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금 나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우는 중인걸까?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도구를 얻고 싶다'는 마음은 그냥 겉치레이고 명분일 뿐이었기때문에, '똑똑하게 일하고 정당한 보수를 받고 싶다'가 결국 진짜 이유였기 때문에 나는 내가 왜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cs지식을 익혀야하는지 이렇게 답을 못찾고 헤매는 걸까? 이런 글을 읽으면 내 진심이 말하는 답이 너무도 분명해 망연해지고 만다. 이제 어쩌면 좋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영화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는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출처 : p28, <당신의 지겨운 슬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동물권 운동은 비인간동물 당사자가 말을 할 수도 없고 행동할 수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다른 존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를 깨닫게 되어 더 자신도 모르는 힘이 난다는 dxe 운영 운동가의 경험을 흉폭한 채식주의자들 팟케스트 에피소드 E39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는 세계(with ‘DxE’ 섬나리, 은영)에서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자기 몸이 한계인 존재이다. 내가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내 몸의 어떤 결함때문이었다. 나는 만성 알레르기 비염을 가지고 있는데 비염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후각이 유달리 예민한 사람의 부류에 속한다. 또 진찰받은 바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숨구멍이 좁고 코뼈가 한쪽으로 살짝 휘어져 있어 오른쪽 구멍이 특히 좁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가 오면 무조건 콧물부터 난다. 어쨌든 이런 나의 신체적 결함 덕에 나는 돼지가 종돈장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상상할 수 있었다. 개보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돼지들이 청소 한번 하지 않는 그곳에서 자신의 분뇨와 다른 돼지들의 시체 냄새가 뒤섞인 악취 속에서 평생을 살다 살해당한다는 글을 읽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몸한번 돌릴 수 없는 철창 안에 갇혀 살아가야한다는 건 어떤 삶일까? 이 질문이 나를 동물과 연결시켜주었다.
그렇더라도 난 평생을 살아도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문장처럼 인간은 자기 몸이 한계이기때문에 자기 몸을 넘어 다른 존재의 아픔을 이해하는 노력은 매번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할 시도를 계속하는 존재가 또한 인간이라는 이 책의 문장은 온갖 고민으로 날뛰는 내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줬다. 매번 반복되는 시행착오에서 그래도 지금보다는 다른 존재의 슬픔, 아픔, 고통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막연한 생각밖에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오늘까지보다는 좀 더 나아진 내일을 믿을 수 있어서 내일을 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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