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책을 사랑하니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때려치고 출판 편집자가 되자.'
퇴사하고 싶을 때마다 내 뇌에서 반복적으로 되는 생각 . 그날도 도저히 이 무의미함을 못견디겠다고 절망하며 우연히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갈피의 기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읽고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깡그리 사라졌다. 이 책은 '편집자 = 문화기획자'라는 나의 생각을 산산조각 내주기 충분하게 편집자의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다시 세운 등식은 '편집자 = 감정노동자'이다. 이 책은 출판사야말로 책의 신성함과 고귀함이 발가벗겨지며 책이 곧 돈이며 출판이라는 과정은 '문화'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산업'에 찍힌다는 사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작가, 디자이너, 마케터, 인쇄소직원, 사장 등등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기위해 관련된 모든 이해관계자 사이의 갈등을 중화시키기위한 편집자의 통화내역을 보고 나자 내가 직접 겪지 않았어도 벌써 이 일에 질려버렸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는 을이다. 모든 것을 조정하고, 조율하고, 부탁하고, 받아내고, 보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나의 하루는 빌고 또 빌다가 끝나기도 한다. 여기서도 죄송, 저기서도 죄송… 디자이너가 잘못했더라도, 인쇄소가 잘못했더라도 책임편집자는 나라서 내가 싹싹 빌어야 한다.
"대표님, 작가님이 갑자기 날개에 들어가 있는 프로필 사진을 바꿔달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죠? 데이터가 이미 넘어갔는데…."
"작가님, 제가 지금 통화를 해봤는데요…. 대표님이 이미 늦었느니 2쇄 때 교체하자고 하시거든요. 죄송해요…. 네? 그럼 약력이라도 추가해달라고요? 그게…."
"과장님, 죄송한데 인쇄 잠시만 멈춰주세요! 표지 수정자가 생겨서…. 제가 데이터 금방 올릴게요!"
"사장님, 표지를 다시 찍게 되어서 종이를 추가로 발주해야 할 것 같아요. 진짜 죄송한데 너무 급해서 그러니 오늘 바로 좀 넣어주실 수 있어요? 정말 죄송해요. 가격은 그때 부탁드린 대로 조금만 더 싸게…."
"실장님, 너무 죄송해요. 작가님이 표지 수정을 요청하셔서….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프로필 셋째 줄에 이 단어 좀 추가해주세요!"
"팀장님, 어떡하죠? 인쇄가 늦어져서 출고가 하루 미뤄질 것 같아요. 광고 일정 좀 봐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p65-66, '난 늘 을이야, 맨날 을이야'
8년동안 그 질리는 일상을 보여주는 방식이 구차하거나 무턱대고 희망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무엇보다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쉬운 순간들마다 유머를 선택하는 저자의 태도가 좋다. 그 태도와 문장이 담백해서 갑갑한 현실을 담고 있음에도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책장은 술술 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자의 일상이 갑갑하고 막막하며 무의미하고 돈도 안되며 고되다. 읽은 나야 남의 일이니 우스운 이 일상들을 킬킬거리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저자한텐 자신의 삶일텐데 이 사람은 왜 이 불리한 계속 책을 만들까 의문이 들었다.
산과 가까운 곳에 흙집을 짓고 풀꽃을 관찰하며 글을 쓰는 어느 작가님을 만나러 갔다. 새로운 원고를 받고 싶어서였다. 그는 이제 아이들을 위한 아름답고 예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잘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들고 간 계약서에는 도장을 받아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울 자격조차 없다고 느껴져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행복하지 않았다. 조금도.
p168, '뭐 하냐, 나 지금'
와우산로라는 책방에서 독립출판을 제작하는 모임에 참석한 '독립출판,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는 장이었다. 그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 모인 사람들의 영롱한 눈빛들을 보고 있자니 저자는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책이라는 것은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구나.'
이 문장에서 나는 김먼지라는 편집자가 그 8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힘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가볍고 장난 같은 말들로 편집자의 지리한 일상을 소개하는 시작에서 <책갈피의 기분>이라는 독립출판물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후반으로 갈수록 책에 대한 저자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느껴져 내 마음도 같이 점점 묵직해졌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글을 쓰고 싶고, 가능하면 책으로도 만들고 싶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좋아서다. 재미있어서다. 사랑하는 내 고양이를 궁디팡팡 할 때의 감촉도 쓰고 싶고, 사라진 단골 까페의 라테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쓰고 싶다. ...
나는 출판사에서 여러 작가들과 함께 그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를 꺼내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다는 건 또 아니다.) 다만, 내 글을 쓰고 내 책을 만드는 소소하고도 은밀한 즐거움이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주고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믿고 있다.
p246,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편집자는 결국 로멘티스트여야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다. 퇴사하고 싶을 때 되뇌일 레퍼토리 하나가 사라졌긴 했지만 역시 좋은 책을 만나는 일은 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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