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통치성, 그리고 비판적 장애 이론, 셸리 트레마인
이번 달부터 저희가 세미나에서 함께 읽을 책은 『푸코와 장애의 통치』 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이 책의 엮은이 셀리 트레마인(Shelley Tremain)가 쓴 서론을 보며 푸코가 제시한 개념과 사유가 어떻게 장애와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푸코의 철학을 통해 ‘장애’를 조명합니다. 푸코가 장애를 말하진 않았으나 푸코만큼 장애 담론에서 언급되는 사람도 드물다고 하더군요. 그 자신이 동성애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푸코의 글은 "정신이상자", "동성애자" 혹은 "감옥에 갇힌 자"들처럼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듯 합니다.
예를 들어 그의 1961년의 저서 『광기의 역사』 는 정신 질환을 가진 비정상인들을 떠올리게 하고, 1961년의 저서 『감시와 처벌』 는 장애인 시설 시스템의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1976년의 저서 『성의 역사』 1권 마지막 장에서 다루어진 생명 권력(bio-power) 또는 생명 정치(bio-politics)라는 개념은 생명활동 자체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중앙 집중적 의료권력의 등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제도 또는 공중보건 문제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셀리는 서론에서 푸코의 관점으로 장애를 규명하는 시도는 아직 초보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책이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모두 16개의 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장들은 독립된 글들입니다. 인식론과 존재론, 역사들, 통치성, 윤리학과 정치학이라는 4가지 대주제로 분류된 글들을 통해 저희는 앞으로 세미나에서 푸코의 관점에서 장애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나온 논의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푸코가 『윤리학의 계보학에 관하여』에서 말한 “나의 요지는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쁜 것과는 정확히 같지 않다는 의미에서, 모든 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위험하다면, 그럼, 우리에게는 항상 뭔가 할 일이 있다.”이라는 문장이 서문 앞에 실려있었는데요. 이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것을 넘어서는 것은 그 체제가 나쁘다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점, 장애인으로 차별받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는 어떤 억압적 배치가 깨지지 않는다는 점을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배치를 흔들 수 있는 지점은 좋다/나쁘다의 감정적인 판단으로만 나아가면 해결을 못하기 때문에 손상과 장애라는 구도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있다면 이 구조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제기가 바로 푸코가 말한 그 문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 사회적 모델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자칫하면 사회적 모델은 이 구도를 안 건드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손상이 있고 그것이 장애화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모델에서 손상은 장애가 장애화되는 출발점으로 봅니다. 그러나 푸코는 손상 자체가 사회적 배치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을 제시합니다. 이는 사회적 모델이 손상을 자연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인데, 결국 손상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손상에도 권력의 효과가 반영되어 있으며 푸코의 시각이 이를 보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푸코가 ‘주체(subject)’에 부여한 이중적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푸코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타인의 통제에 예속되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의식이나 자기 지식을 통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타인에게 예속되는데 왜 객체가 아니과 주체라고 말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는데요. 우리말에서는 주체가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되기 때문에 ‘주체로 만든다’, ‘주체로 형성된다’라는 표현에서 주체가 대상인 것인지 자격인지 헷갈린다는 물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주체를 영어로 생각해서 subject라고 하면 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기때문에 영어나 불어로 인식하면 그 이중적인 느낌이 더 쉽게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적 모델 문제제기를 할 때 ‘장애인이 된다’와 ‘장애인으로서 주체가 되었다’ 두 말은 애초에 떼어낼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주체가 되는 것과 주체로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자신을 생산한 모델을 싸워나갈수록 강화하게 되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저항할수록 저항하고자 하는 그 구도를 강화하게 된다는 논의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까지 생각이 확장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보입니다.
저항의 형식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권력을 소유하는 집단을 전복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면 주체화된 장애인이 어떤 방식으로 대항해야 하는가에 문제제기가 있었는데요. 대항정치에 대해서 푸코주의자는 미시적인 방법을 낭만화한다는 느낌을 받는데 막스에 비해서 어떻게 대항해야한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물질적인 토대를 몰라서가 아니라 푸코는 우리가 근본적인 전제로 하고 있는 이 현재의 물질적 토대를 들어내는 지도 그리기와 같은 작업을 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제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에는 83%정도의 사람들이 백지투표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선거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보이는데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근저에 깔린 사고방식을 공격하면서, 예를 들어 왜 우리는 국회라는 형태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지, 그 안에서만 해법을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푸코의 작업이 우리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의심한다고 해서 반드시 새로운 것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런 밑작업이 새로운 배치를 탄생시키는 방법이 아닐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푸코를 담론 구성물로 바라보고 비판하는 논의들에 대하여 이에 대해 푸코가 거시/미시를 구분하는데 초점을 맞췄던 것 같지는 않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의 생각이 푸코의 담론이 미시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데 개인의 행동은 미시고 경제는 거시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는 또한 이유가 있을 듯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서론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이 책에 나온 논의들을 한번씩 훑은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